[쿠카우타] 어른의 첫눈
W. 손도라
‘자고로 겨울의 만찬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눈에 보이는 선명한 온기와 보기만 해도 식욕을 돋우는 윤기, 그리고 소중한 사람과 함께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일전에 본 칼럼의 한 구절이 생각나던 참이었다. 지금 나에겐 100년의 역사가 담긴 라멘 한 그릇과 이따금 심심하지 않게 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서술자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상황이다. 적어도 5분 전까지는 그랬다.
“상대적으로는 보기 힘드니까요. 그만큼 기대하게 되지 않나요?”
“맞아요! 모든 로맨틱함의 시작, 겨울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죠. 오늘의 주제는 바로바로~ ‘첫눈’입니다!”
십대 여자아이들을 겨냥한 포맷은 언제나 비슷하다. 신비한 점괘, 뷰티 정보, 우정과 사랑. 지금 내 귀를 관통하는 소리가 딱 그런 류의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신인시절에 거쳤던 섭외 요청과 출연으로 이제 이런 수준은 화면을 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참 쓸데없는 능력이다. 다른 프로그램들보다 더 노골적으로 내세우는 뻔한 아이템들은 재미도 수확도 없기 마련이며, 오히려 사방에서 들어오는 무례한 질문과 참견들로 공격 받기 좋은 환경만 만들어준다. 이 진절머리 나는 구조도 문제지만 더 끔찍한 건 그 구조를 주무르는 사람들이다. 누가 봐도 뻔한 아이템으로 운 좋게 인기를 끌면 꼭 새로운 업적을 달성한 것처럼 콧대를 높이는 PD들은 이름만 들어도 역겨울 지경이었다. 생각하다보니 어제 마주친 그 역겨운 PD 중 한 사람이 떠올라 더욱 더 열이 올랐다.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컵에 가득 찬 찬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튼 그런 끔찍한 산물이 방금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가게 안을 지배하고 말았다. 화면을 보니 예상에 빗나가지 않는 프로그램 분위기와 대본대로 필사적인 웃음을 지으며 목청을 높이는 출연자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동종업자로서 그들의 노고는 너무나도 잘 알지만 오늘만큼은 그 노고가 한 층 꺾여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아, 저 프로. 요즘 주인 아주머니가 자주 챙겨보시는 프로래.”
“아무리 봐도 십대 여자애들 보라고 만든 포맷 같은데.”
“딸이 챙겨보던 걸 같이 보다가 재미 붙이셨다나.”
“가게 분위기랑은···아.”
스트레스에 못 이겨 내질러질 이기심을 가까스로 막았다. 아무리 내 기분과 법칙에 맞지 않아도 때와 장소를 가리고 듣게 될 사람들을 의식해야 한다. 나는 어른이니까, 공인이니까. 그리고 건강한 나를 위한 다스림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수 있어. 지금의 나는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야.
“잘 참았네. 한 그릇 더 먹을 거지? 같이 시킨다.”
“내가 뭘.”
“방금 뭐 참았잖아. 같은 거 먹을 거야?”
“···아니, 이번엔 미소라멘.”
하마터면 겨우 누른 무언가를 애먼 데에 토해낼 뻔했다. 왠지 모를 죄책감에 괜히 빈 그릇만 시야에 담았다. 이 정적을 먼저 깨고 싶지 않다. 그런 건 내 캐릭터가 아니라면서 남몰래 책임을 놓는다. 지금이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가끔 어지러운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효과가 있으니 말이다. 기대하는 즉시 마음속으로 외친다. 지금이야. 어서 아무 말이라도 걸어봐. 받아주는 건 해줄게.
“그러고 보니 이번 주에 첫눈 온다더라.”
그렇지.
“별로 반갑지 않은 소식이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반가웠다.
“···눈이 오면 여러모로 힘드니까. 차로 이동할 때라든지. 야외 촬영이라든지.”
“그건 그렇겠네. 그래도 보기 좋잖아. 의미도 있고. 그러니까 저 토크쇼에서도 그거 하나로 저렇게 오래 얘기하는 거고.”
“애들 보는 프로라서 가능한 거야. 첫눈이 반가우면 아직 어리다는 뜻이라고.”
“우리 아직 젊거든. 반가울 수도 있지.”
“누가 우리야. 너만 어린애지.”
“허어, 그러세요. 그래요. 저는 어린애죠.”
그치만 얌전히 받아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오늘도 의미 없는 변명으로 나 자신과의 대화를 마쳤다. 더불어 쿠카이와 나눈 짧은 대화도 새 라멘 그릇이 나옴과 동시에 어물쩍 마무리 되었다. 입을 삐죽 내밀고 젓가락을 분리하는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이미 충분히 트집을 잡으며 걸고 넘어졌지만 이때만큼은 더 해볼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정말 못됐네. 아까 풀지 못한 스트레스가 이렇게 나오는 건가. 분명 어떤 주제로 물꼬를 트든 좋은 분위기로 받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게 더 편하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서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
감사히 받은 키워드로 연성한 건데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 몇 주를 미루다가 겨우 탈고한 단문
키워드는 일단 '첫눈'이지만 어쩐지 우타우의 연말 스트레스가 숨겨진 주제가 됐다
원래는 뒷 스토리가 더 있어서 볼륨이 상당히 큰 글이 될 뻔 했는데 현생도 그렇고 슬슬 연성에 집중하기 어려운 시기가 돼서 결국 되는 데까지 다듬기만 하다가 볼륨도 확 줄고 퀄도 어중이떠중이가 되고 말았음...
흑흑 첫 쿠카우타 연성인데 흑흑....
뒷 얘기 조금이라도 더 쓰고 싶은데 맘처럼 쉽지가 않네 지금도 탈주해서 잠깐 업로드 하는 거라ㅠㅜㅠㅜ
모 쿠카우타 좀 먹어봤다는 분들은 아시겠죠 우타우가 방심하고 어린애 취급은 두 번이나 했네요 예
아무튼 키워드 주신 H님 감사합니다ㅠㅜㅠㅜ이런 걸 원하셨던 게 아니었을 텐데 넘 죄송하네요ㅠㅜㅠ
'캐릭캐릭체인지(Shugo Chara!) >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기리마] 안경 (0) | 2020.06.02 |
---|---|
[나기리마] Surprise (0) | 2020.05.31 |
[나기리마] 만나고 싶은 (0) | 2019.12.15 |
[나기리마] 달밤의 고백 (0) | 2019.12.14 |
[이쿠아무] 가을의 단풍색 (0) | 2019.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