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 시리즈/연성

[아사키스] D-12

손도라/핸디 2023. 12. 29. 10:53





[아사키스] D-12
W. 손도라




키스미는 잠시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계 소침이 11과 12 사이에 머물러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서너 개의 이사박스가 포장된 그대로 켜켜이 쌓여있었다. 이 정도면 많이 했지. 머릿속에 처음 집안으로 박스들을 들일 때가 스쳐지나갔다. 먹을 때, 잘 때, 이사에 필요한 바깥 일 볼 때를 제외하면 이틀을 꼬박 짐 정리에 매진했다. 둥지를 새로 틀려면 무척 부지런해야 한다는 카츠미 삼촌의 조언이 아주 정확했다. 키스미는 빈 박스들을 정리한 뒤 숨을 돌리기로 했다. 등과 엉덩이가 의자에 닿자마자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남은 박스들의 내용물을 더듬어보건대 앞으로 길어야 두 시간을 웃도는 시간에 이삿짐 정리가 완전히 끝날 것 같았다. 남은 소요시간이 계산되니 입 밖으로 '내일 할까'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키스미는 택배박스와 바닥 사이 어딘가를 공허하게 응시했다. 그때 어디선가 은은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키스미는 눈만 데굴 굴리며 소리에 차츰 집중했다. 멍해진 머리가 조금 환기됐다. 포장용으로 보이는 종이봉투 밑에서 핸드폰이 울고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키스미? 이삿날이 오늘이랬나? 이사 잘했어?"

키스미의 주변인 중 이 늦은 시각 스스럼없이 연락을 하며, 이렇게 급속도로 그를 즐겁게 만드는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반쯤 빠져있던 정신이 갑자기 들어온 지도 몇 초 되지 않은 마당에 이런 자극까지 키스미는 평소보다 더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스피커 너머로 당황스레 되묻는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왜, 갑자기 왜 웃는데?"

키스미는 살짝 목을 가다듬은 후에 대답했다.

"이삿날은 어제였어, 아사히."
"뭐? 오늘 28일 아니야?"
"29일-."
"엑, 그러네?!"

알고 있었는데 순간 달력을 잘못 봤다며 항변하는 아사히의 목소리에 키스미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만 웃으라며 역정 내는 목소리뿐인데도 그의 표정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 * *

"그럼 짐 정리는 다 안 됐겠네. 아직 이틀 밖에 안 됐으니까."
"아무래도, 박스 4개 남았는데 그 중 하나는 겨울 외투들이라서 실질적으로는 3개?"
"박스 3개면 내일 금방 해치우면 되겠다."
"그치만 애매하게 남아서 다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해."
"지금 12시 다 됐는데 잠은 언제 자려고."

키스미는 아사히의 말에 완전히 납득하고 말았다. 후련한 마음으로 끝내놓고 늦잠 자기와 생활리듬에 맞게 제때 자고 일어나서 끝내기, 이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사람의 마음이 한 쪽으로 기울어 안착했다. 후련한 건 전자일 것 같았는데 후자를 택했음에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키스미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간단한 주변 정비를 하며 통화를 이어갔다. 어느새 그의 움직임에도 조금 활기가 돌았다. 힘 있는 목소리 사이로 나지막이 섞여들리는 소음에 키스미가 물었다.

"그나저나 아사히, 지금 밖이야?"
"오, 맞아. 잠깐 편의점 다녀오는 중."

아사히는 핸드폰 충전선이 의자에 집혀서 고장이 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편의점과 핸드폰 충전 따위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대화가 좀처럼 끊이질 않았다.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단어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이었다.

"지금 달이 엄청 밝아."

이 또한 아사히로부터 비슷한 흐름으로 전달된 주제였다. 키스미는 창밖으로 시선을 올렸다. 달이 창틀에 반쯤 가려졌는데도 밝은 보름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니 완벽한 보름달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헤에, 진짜 밝다. 보름달이야."

키스미의 입매가 더욱 호선으로 변해갔다.

"아사히는 2주 뒤에나 온댔나?"
"대충 그 정도 될걸?"
"있지, 도와주러 가도 돼? 어차피 같은 대학교면 근방일 것 같은데."
"나야 고맙지. 그치만 나만 도움 받는 셈이라 왠지 미안하네."
"내가 먼저 왔으니까 못 도와주는 게 당연하잖아. 대신 아사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 거야."
"아직 그런 말 안 했거든···."

키스미는 다시금 달력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말해놓고 당일에 사양해도 입에서 배부르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지역 특산품이니 식사니 하며 끊임없이 줄 거면서. 아무도 모르는 디데이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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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연성은 되게 오랜만이라 즐거웠다~~~~~
원래는 같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는 두 사람을 쓰고 싶었는데 어째선지 이사로 포커스가 옮겨졌다는 후일담
아사히는 어릴 때부터 이사를 자주 했으니 이사 관련 노하우는 조금 더 많이 알지 않을까
그치만 짐 정리 능력은 키스미쪽이 우세할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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