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죽어(Kimi ga Shine)/연성

[큐마이] 방해자

손도라/핸디 2023. 8. 18. 02:58




[큐마이] 방해자

W. 손도라



빽빽이 나열돼있는 책등들을 손끝으로 무심히 쓸어본다. 직물로 엮인 양장본 특유의 촉감만이 남았다. 소름 끼치는 기시감이다. 으레 이런 규모의 서고라면 먼지가 쌓이기 어려운 책등을 만져도 책이 뿜는 분진이 조금이라도 느껴지기 마련인 것을. 이런 구석에서조차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심히 모욕으로 다가왔다. 이곳에서 제대로 살아 숨쉬는 존재는 과연 몇 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초의 시련에서 살아남은 자들, 그 중에서도 메인게임에서 희생되지 않은 자들. 그들은 당연히 이곳에서 가장 완벽한 산 자로 분류된다. 그렇지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인간의 도리를 버리면서까지 생존만을 절박하게 좇는 경우라면 어떨까. 가령, '더미즈'는 과연 그들과 똑같이 완벽한 산 자로 분류될 수 있을까.
색깔별로 꽂아둔 책들이 깔끔해보이기는 커녕 기분만 나빠졌다. 정상적인 서고라면 고작 색깔 따위로 책을 정리해두진 않는다. 평범하게 살아있을 시절에 자주 갔던 서점이나 카페는 물론 영화나 드라마 등지에서도 이런 서고는 본 적이 없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느끼는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눈으로는 이 플로어에 숨겨진 단서를 찾는 척 빠르게 움직였지만, 손끝은 무심한 척 시야에 있는 책 중 가장 두껍고 단단한 책을 몇 개 더듬었다.

"그 쪽은 어뗘? 뭐 눈에 띄는 게 있나?"

무언가로 얼룩진 상념이 갑작스레 날아온 굵은 음성에 잔잔한 긴장감으로 돌변했다. 마이는 맞닿아있던 책 한 권을 재빨리 뽑아 펼쳐들고서는 미간을 조금 구겼다.

"으음, 아직은 재미없고 퀘퀘한 책들뿐인데. 도서관이라 더 찾기 어려운 것 같아~"
"나도 책이랑은 그닥 친하질 않아서 말여. 거 참 많기도 하구만."
"목표를 잡고 찾아보면 어때? 엄-한 책이라든지. 그럼 더 속도가 나지 않을까?"
"엄-한 책이라는 게 무신...뭐, 뭔 소릴 하는겨! 이상한 소리 말고 탐색이나 하래이!"
"알았데이!"

붉은머리 거한은 다시 반대편 서고로 몸을 돌렸다. 마이의 꾸며진 표정이 차츰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책 표지에는『massacre』라는 짧은 제목이 음각되어 있었다. 의식하고 보니 손에 든 것이 제법 두꺼우면서도 적당히 묵직했다. 이거면 충분히 성공할 것 같은데. 손끝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면 한 번에 성공시켜야 한다. 살고 싶다는 본심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곧 손끝까지 힘을 실었지만 차마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무력감에 다시 미간이 구겨졌다. 그리고는 곧바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다음 기회를 노리자. 할 수 있어. 마이는 재차 자신을 꾸몄다. '이 책은 제목이 섬뜩하네' 따위의 말을 마치 누군가 들으라는 식으로 읊조리고는 손에 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했다.

"잠깐만."

갑작스레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마이를 제지했다. 하마터면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릴 뻔했다. 큐타로는 빠르게 떨어지려던 책을 받쳐들었다. 손아귀 범위가 너무 넓었던 탓에 마이의 손까지 받친 모양새가 되었다. 꽤나 우스웠다.
마이는 큐타로를 올려다보았다. 큐타로는 마이나 제 손에 받쳐진 책이 아닌 눈앞의 책장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니 목재 책장 틈에서 작은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큐타로는 조심스레 그것을 툭 건드려 뽑아내고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대로 살펴보았다.

"그 방해자놈들 이빨 조각 같은데. 왜 이런 데 박혀있는 거여. 마이, 손 베인 곳 없제?"

이름이 불리고서야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던 상태에서 깨어났다.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큐타로는 도서관을 나와 한 발 먼저 앞서 나갔다. 큐타로와 마이, 두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뒤따라 걷는 마이의 시야에는 큐타로의 넓은 뒷모습만이 들어왔다. 일순간 다음 기회가 주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아서, 다시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 꼿꼿한 시선에 오로지 그 일념 하나만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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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큐마이 연성인데 어째서 이런 어두운 글이...
진단메이커가 '두꺼운 책', '대학살', '얼룩진' 이딴 키워드만 던져준 탓이다 흑흑 대학살이 뭐야 뻐킹
큐마이 달달한 아이싱길만 걸어